"산책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맨 밑바닥을 바라보게 하고, 그로써 인간을 정치적으로 만듭니다."

(김시덕). 

써티랩은 지난 4월 10일에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도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뉴스로만 접했던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과 대치동 아파트의 상징인 은마아파트와 그 상가를 둘러보며, '학벌주의'라는 키워드로 사고 회로를 돌려보았습니다. 

먼저 제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고3 당시에는 몰랐는데, 제가 대학에 진학하던 때엔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상태였더라고요.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중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데, '내가 한국의 학벌주의와는 철저하게 동떨어진 삶을 살았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래도 되나 싶더라고요. 

살펴보니 입학사정관제는 제도 그 자체부터 복잡한 것이어서, "어차피" 이해도와 정보 접근성이 부족했던 저로선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웠을 제도였을 것입니다. '학교 시험 잘 보고, 수능은 필요한 최저 등급을 맞추고, 논술만 잘 보자.'가 제가 채택한 입시 전략이었으니까요. <대치동>의 저자 조장훈은 입학사정관제에 관한 정보 접근성이나 이해도는 엘리트 상층 계급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어서, 학벌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합니다. 저도 이에 반론을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듯한 입시 전략을 세울 수 없었던 제 눈에도 정말 그런 것 같거든요.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친부로부터 받은 학업에 관한 조언은 '1등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엉뚱하죠. 이 엉뚱한 조언은 친부 자신과 제게 각각 까방권(까임 방지권)을 부여해 주었는데요. 친부 입장에선 자식이 공부에 너무 몰두해 좌절을 겪거나 뉴스에 나오듯 치열한 경쟁에 지쳐 삶을 마감하는 학생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실제로 위 조언의 근거였습니다만,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보호하려는 아빠 역할을 다할 명분, 제게는 좋은 성적을 받지 않아도 될 학생 된 자식으로서의 명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친부가 제게 줄 수 있는 입시에 대한 정보나 고급 지식(또는 스킬)을 획득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슬프고도) 이면적인 전략이었고, 제게는 숙명처럼 '송충이는 솔잎만을 먹어야 한다'(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자조적인 자화상을 갖게 했으며, 좌절을 잠깐 유보할 뿐인 전략이었음을 고백해야겠어요. '학벌주의'의 한국 사회에선 1등인 게(1등급이 많은 게) 요긴하지, 3등이나 13등은 딱히 특출 나다고 할 수 없거든요. (정확히는 내세울 곳이 없죠.) 

<강남엄마 따라잡기>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출연한다고 해서 시청했던 드라마죠. 강북에서 살던 가족이 교육 문제로 강남으로 이사해 '강남 사람'처럼 살기 위해 분투하는 드라마고요.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도 있어요. 특출 나게 '공부'할 줄 몰랐던 제가 충분히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게 '입시'란 '드라마' 같은 거였어요. 남의 얘기 같았죠. "1등 하지 말라"는 조언이 '우리 팀'(저는 입시가 '팀전'이라고 생각합니다)이 취한 전략이었으니, 1등이 아닌 사람들은 주목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습니다. 

요즘 저는 '다른 의미의 입시'를 경험하고 있는데요. '자격증' 하나를 따기 위해 애쓰고(애먹고) 있습니다. 경쟁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좋은 학벌을 가진 이들이더라고요. 치열하게 입시를 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배워 온 이들과 겨루려니까 힘에 부치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 저는 '학벌주의'를 깨부수자고 말할 만용은 있지만 아직 능력은 없으므로, 일단 당분간은 사회의 모순을 끌어안고 가자는 게 요즘 제 삶의 태도입니다. 언제까지나 송충이로만 살 수는 없고, 송충이의 성충인 솔나방에게도 날개가 있어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슬프게도 세상은 송충이를 해충이라고 말합니다. 송충이가 해충이 아니기 위해선 생태계 차원에서, 생태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겠죠. 이번 대치동 산책은 제 자신의 맨 밑바닥을 바라보고, 그로써 '나'라는 인간을 더 정치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생태계가 학벌과 상관없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이롭게 여겨질 수 있는 생태계가 될 수 있도록 말이죠. 

틈만 나면 '학벌주의'와 겨룰 생각입니다. 엘리트가 걷는 길 외에도, 천 개의 길을 더 만들고요.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은밀한 방(房)을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법을 찾아볼 거고요, 엘리트를 향한 핀조명을 전체등으로 바꿀 생각이에요. 그림자를 없애는 일이죠. 송충이는 해충이라고 말하는 이들과 글과 말(정치적인 방식)로 다툴 일도 있을 겁니다. 설득도 필요하고요. 더딜 테고요. 오해도 받을 거예요. 많이 부지런해야겠어요. 유일하지 않을 천 개의 대치동을 만들려면요. 

가장 인상적이고 제일 흥미로웠던 건, 당연 은마종합상가(이하 은마상가)였습니다. 은마상가에 대한 첫 이미지는 을지로와 종로를 수직으로 세운 상가 건물이었습니다. 동네장터 같은 곳이었달까요? 강남 한복판에 재래시장이라니 싶겠지만 은마상가 입구에도 떡하니 ‘풍물장터’라는 정겨운 단어가 적혀 있었답니다. 은마상가는 1979년 준공되어 지금까지 50여년 동안 대치동을 대표하는 건축물인데요. 말그대로 종합(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서 합함) + 상가(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는 거리)입니다. 상가 안은 마치, 홍콩의 야시장을 온 것만 같은 향연이 펼쳐지는데요. 대낮의 대치동에 마주할 수 있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뽀글이 파마를 주력으로 할 것 같은 미장원 옆에 수학 교습소가 있고, 교습소 옆에는 서점이, 그 옆에는 쇼윈도에 커다란 하프가 전시 되어 있는 악기상이, 악기상을 지나선 이름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교복점이 있었습니다. 상가를 돌다보니,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 터를 잡고 있는 경남종합상가가 생각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 추억의 많은 부분이 그 상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하나은행으로 통합된 외환은행에서 인생 첫 통장을 개설한 것도, 병원을 갔다하면 꼭 들려야만 했던 '토마토 아저씨'라는 상호의 경양식집도, 상가 앞 하늘색 공중전화에 대고 1541 콜렉트콜로 ‘엄마, 서윤이야 전화 줘!’하고 수없이 전화를 걸고 끊었던 시간들도 떠올랐죠.

은마상가를 거닐며, 상가의 모습이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습니다. 요즘은 종합상가보다는 백화점이나 쇼핑복합시설, 아울렛과 대형 마트로 그 문화가 발달된 것 같습니다. 편리하고, 쾌적하며, 스마트 합니다. 은마상가는 강남의 여느 건물들처럼 쾌적하거나 스마트한 곳은 아니었습니다만,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공간을 넘어, 사람들이 만나 소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장소였습니다. 강남 한복판에 자본주의보다 인정(人情)이 앞서는 건물이 있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했습니다.

은마상가는 재개발 계획에 따라 언젠가 철거되겠죠. 물론, 낡고 노후화된 시설을 개선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재개발 과정에서 은마상가가 지닌 고유한 분위기와 사람 냄새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욕심이라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한 편으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 걸까요? 도시 개발 속에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고 싶은지를 말이죠.

“이게 대체 뭐야?” 대치동 학원가를 걷던 중, 의아한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스트레스 프리존’이라는 이름의 휴식 공간이었죠.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니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는 소리 측정 기계와 작은 의자만 놓여 있었고 벽에는 ‘스크리밍존: 소리지르GO 스트레스 날리GO!’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2023년 4월, 서울시 강남구는 대치동 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8~19세만 사용 가능한 스트레스 프리존을 설치했습니다. 학생들은 백색소음을 듣고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는 ‘10분 사운드 테라피존’, 실내 사이클 기구가 놓인 ‘10분 피트니스 테라피존’, 충전·독서·음악 감상을 제공하는 ‘10분 리프레시 테라피존’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된 이 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에서 강남구 관계자는 개장 후 두 달 동안 500여 명의 시민이 이 공간을 이용했다고 전했습니다.

대도시의 휴식법인가 싶었습니다. 차가 쌩쌩 달리는 6차선 도로 바로 옆, 출입 스티커를 발급받은 뒤 자그마한 집 형태의 박스 안에 들어가 고작 10분 동안 정해진 휴식을 취하고 나가는 모습이 어딘가 괴이했습니다. 작은 공간에 욱여넣은 겉보기 휴식 방법, 제한적인 운영, 폐쇄적인 디자인은 대치동 학생들의 상황과 필요를 심도 있게 고려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대치동의 외부인인 저에게 스트레스 프리존은 휴식인지 고립인지 모를, 쉴 공간과 시간이 부족한 현실을 반증하는 공간이었죠.

고등학생 시절의 여러분은 어떤 곳에서 쉼을 누렸나요? 저는 고등학생 시절, 무교였음에도 학교 안 기도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낮은 조도와 푹신한 방석, 조용한 공간에 편안함을 느껴 자주 찾아갔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 떠올려 보니 그 이유가 아닌 듯해요. 기도실에 가면 종교를 떠나, 어려움을 갖고 있는 친구와 마음을 나누고 기댈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죠. 서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지켜주고, 눈치껏 같은 때에 기도실을 나와 자연스레 서로 고민을 들어주었으니까요. 또 기도실 앞에서 우연히 선생님들을 마주치면 민망한 기분으로 따뜻한 눈빛을 받았던 것 같아요. 수업 시작 전, 고작 10분짜리 휴식에도 다양한 삶이 녹아있고 또 삶으로 이어졌던 고등학교 시절의 휴식법이었죠.

저는 길 건너면 목동인 동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다지 멀지 않은 동네에 살고 있어요. 목동도 대치동 못지않게 교육열이 뜨거운 동네인지라 준돌님이 소개해 주는 대치동 곳곳을 누비며 학창 시절에 스쳐 지났던 풍경들을 다시 만나 난데없는 향수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깔끔하게 계획된 아파트 단지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상가건물. 그 안에서 안온한 미래를 사고자 고군분투하는 각자의 일상이 오늘따라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휴일에도 학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과 학원 문 앞을 서성이며 그런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님들. 공부하는 학생들로 들어찬 학원가 카페를 보며 십여년 전 다녔던 종합학원에서의 경험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셔틀버스만 스무 대가 넘는 그 학원에는 주요 과목을 모두 가르치는 종합반만 열댓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반 배정을 받고 처음 수업을 시작하던 날 온갖 쪽지 시험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듯 배우지 않은 범위를 시험 당하며 무언가 잘못 됐다 느꼈던 것도 같습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연달아 치러지는 월말 반 배치고사를 두어번 더 거치고 저는 빠르게 판단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살다 간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병원에 먼저 들어가겠어!

그때의 제가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는 어떤 모양이었을까요?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좋은 학위를 따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좋은 급여를 받는 그런 미래를 꿈꿨던가요? 은마아파트 한복판에 놓인 두 개의 헌장을 보며 생각이 깊어집니다. 1957년 5월 5일에 세워진 어린이 헌장과 1982년 5월 8일에 세워진 경로 헌장. 두 비석은 유년의 가능성과 노년의 존엄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놓인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찬란했던 가능성이라는 씨앗은 부지런히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어 열매 맺을 준비를 하고 있나요?

목동에 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1987년에 조성된 파리공원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이 공원은 몇 년 전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리모델링 한 후 재개장 했는데요. 새로 들어선 야외 놀이시설과 체육 시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문화공간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주민들이 찾아와 여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숨 가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와중에도 잠시 잠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여유를 누리는 모습을 보며 작은 힌트를 얻어 봅니다. 아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고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부모님들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결과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서겠지요. 모두가 그리는 상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좀 더 풍족하고 좀 더 여유로운 내일을 위해 우리는 오늘을 기꺼이 투자합니다.

얼마 전 그런 글을 읽었습니다. 엄청난 목표치는 오히려 금방 사람을 지치게 한다고요. 원하는 목표를 이뤘을 때 삶의 모습이 어떠할지 그려보고 오늘부터 그렇게 살아내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샌가 그 목표에 닿아있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하지 못했던 유년을 후회하거나 그러할 수 있을까 막연한 노년에 불안하기 보다 지금 그러한 청년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도 바라는 삶을 살아내기를 응원할게요.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요.

[로컬 투어]  ‘강남’ 하면 으레 떠오르는 강남대로 유흥가(강남-신논현-논현), 테헤란로 사무실(역삼-선릉-삼성), 럭셔리 부촌(신사-압구정-청담) 같은 일시적 방문지 느낌이 아닌, ‘생활지로서의 강남’ 모습을 써티즈 탐방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대치(=한티) 지명 유래가 깃든 구(舊)마을과, 아파트·빌라·상가·시장·학교 등 각종 생활시설에 지역민들이 어우러지는 일상공간을 경험하게 되어 탐방 목적을 나름 잘 달성했다고 평가합니다.

[생애 활동지 방문]  ‘역삼동-대치동-서초동’으로 이어지는 제 생애 터전 중 하나인 대치동에서, 이번 탐방 중 제가 유아기 시절 살았던 집 건물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곳을 향해서 하천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이, 저도 인생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을 때 아주 가끔 혼자 방문하곤 했는데요. 허물고 새로 짓기를 빠르게 반복하는 도시공간에서 오랜만에 또 이곳을 찾아오니 ‘내 존재의 기억을 머금은 곳이 아직은 헐리지 않았구나.’라는 작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경험담을 소개하며 대학입시·사교육에 관한 제 생각을 갈음할까 합니다. 평일·주말 상관없이, 매일 밤 10시가 되면 은마아파트 사거리는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미성년 학생(주로 중고등학생) 인파와 이들을 태우려는 학부모님들의 자동차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십수 년 전 저 역시도 이 장면을 구성하는 한 사람이었죠. ‘수능이 끝나면, 대학을 가면,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면 이 지긋지긋한 입시공부와 회색빛 학원생활, 모두가 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슬픈 레이스를 끝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저였습니다.

수능을 두 번 치렀던 제가, 각각의 수능날 밤에 했던 행동은 이 사거리에 나와서 청소년들의 귀갓길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명문대에 진학한 입시승리자의 도취감 같은 것이 아니라, 무한경쟁 입시지옥에서 말 그대로 ‘죽지 않고 생존한’ 저를 위로·격려하는 일종의 제의(ritual)였지요. 그리고 아직 그 레이스 한복판에 있는 후배세대들을 위해 신의 가호를 빌며 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그저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능은 K-무한경쟁 중 ‘가장 쉬움’ 난이도였을 뿐이고, 이후로도 수많은 경쟁에 치이며 자란 현재 한국의 많은 2030청년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 큰 희망·소망을 두며 살아가기를 꺼리는 중이죠. 합계출산율 곧 0.6명 시대, 청소년·청년이 행복을 느끼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제 꿈은 너무 순진한 것이려나요? 써티즈 탐방일도 마침 총선 임시공휴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대낮부터 학원가를 걷고 있던 많은 청소년들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