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연구 주제: 중독 이달의 연구목차
1. 아콧의 취미생활 "나를 넘어서는 중독"
2. 비버의 채집노트 "커피 두통"
3. 베르의 동네철학 "우리 사회가 중독된 것들에 대하여"
4. 더기의 불편 모음집 "혐오중독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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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티공방 재오픈✨
"써티랩 연구원들과 나의 고민을 연구하고 생각을 나누고 싶은 써티즈 주목!"
💡7월의 연구 주제 : 질병
두 번째 써티공방 커밍쑨!
7월 8일 토요일 을지로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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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날이 더워지면서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얼음 동동 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생각나는 계절에 들어섰습니다. 이번 달 써티랩 모임에서 연구원들도 더기가 준비한 상큼한 자두로 여름을 맞이했습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수록 선풍기와 에어컨에 의존하게 되는 이 계절, 중독을 이야기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인 듯 합니다. 중독(中毒)은 크게 유해 물질로 인해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Intoxication)과 특정 물질이나 행위에 의존하는 증상(addiction)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중 물질이나 행위가 주는 쾌락을 탐닉하고 그것에 의존하게 되는 현상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독입니다. 가장 개인적인 탐닉의 이야기부터 우리 사회가 마주한 중독 현상까지 우리 주변의 중독을 돌아봅니다. 당신을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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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 하루는 스마트폰으로 시작해 스마트폰으로 끝납니다. 눈을 뜨면 자는 동안 쌓인 알람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새로 생긴 대여권으로 웹툰과 웹소설을 봅니다. 지인들 소식이 궁금해 인스타에 들어갔다가 결국엔 한참 탐색 창을 헤매게 됩니다. 실없는 유머글과 핫플 소개글을 지나 지인들의 스토리를 훑고 나면 자기 전에 돌려뒀던 게임의 아이템 생산이 마무리될 시간입니다. 다음 생산 예약을 걸어두고 오늘치 퀘스트를 완료하며 한편엔 유튜브를 틀어둡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음악이나 재밌어 보이는 예능을 백그라운드에 깔아두고 빠르게 오늘치 할당량(?)을 채웁니다. 배가 출출해질 때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할 수 있을 법한 레시피를 검색해 한 끼를 챙겨 먹습니다. 때로는 검색할 것도 없이 쇼츠가 그날의 메뉴를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하하 호호 웃으며 볼 수 있는 클립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일말의 양심을 챙기기 위해 자기 계발 콘텐츠나 뉴스/시사 콘텐츠를 챙겨봅니다. 그렇게 방구석 랜선 여행을 마칠 때쯤이면 쿨타임이 찼습니다. 다시 생성된 대여권으로 웹툰을 보러 갈 시간입니다. 별다른 스케쥴이 없는 날이면 이 사이클을 한 두 번 돌다 보면 금방 하루가 지나갑니다.
뒤늦은 코로나 앓이로 골골대며 비몽사몽 하는 동안 할 수 있는 게 스마트폰밖에 없다는 핑계로 시작된 이 패턴은 자가격리를 마치고도 바닥을 친 체력이 쉽사리 돌아오지 않은 몇 주 동안 몸에 익어 달갑지 않은 루틴이 되어버렸습니다. 틈틈이 책도 읽고 글도 쓰려 노력하지만 금세 손쉽게 재미를 얻을 수 있는 패턴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따로 검사해보지 않아도 고도의 스마트폰 중독이 의심되던 찰나. 저의 이런 고민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지 알고리즘은 냉큼 도파민과 중독에 관한 콘텐츠들을 추천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중독에 빠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본능이라고 합니다. 어떤 행위를 통해 쾌락, 즉 긍정적인 보상이 주어진다면 생명체는 자연히 이 행위를 반복하게 되고 이 행동은 강화됩니다. 중독의학을 연구하는 애나 렘키 박사는 쾌락과 고통의 균형을 통해 중독 현상을 설명합니다. 놀랍게도 쾌락과 고통은 뇌의 동일한 부분에서 처리되는데 뇌는 마치 시소처럼 쾌락과 고통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도파민이 분비되어 쾌락 쪽으로 시소가 기울면 균형을 조정하는 신경 물질이 분비되어 시소가 고통 쪽으로 기울게 합니다. 이 물질은 시소가 균형을 찾은 후에도 잠시 동안 남아있어서 결국 우리는 또다시 도파민을 분비하게 할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됩니다. 이 시스템은 작지만 얻기 어려운 보상을 얻은 후 또 다시 그 보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쾌락 과잉의 시대를 살며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다 보면 쾌락과 기쁨의 기본값이 높아져 우리는 어느새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자극을 찾게 됩니다. 다시 말해 뇌의 보상구조가 고장 나게 되는 겁니다.
다행히 이 시소는 반대로도 작동하기 때문에 시소가 고통 쪽으로 먼저 기울게 한다면 균형을 되찾기 위해 도파민이 분비되는 방식으로 균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며 몸을 움직이고 땀을 내다보면 처음엔 숨이 차고 힘들지만, 고통 쪽으로 기운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뇌가 도파민을 분비하면서 몸이 가뿐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은 중독과 본능을 다룬 유튜브 콘텐츠에서 어쩌면 몰입과 중독은 같은 메커니즘이라고 말합니다. 보상회로를 통해 강화된 행동이 긍정적인 효과를 내면 몰입 또는 집중이라 말하고 부정적인 효과를 내면 중독이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독에 빠진 원리를 역이용해 긍정적 중독에 빠져볼 수 있지 않을까요. 조금은 어려운 자신과의 싸움이 되겠지만 이론으로 무장했으니 당분간 도파민 단식을 위한 여정을 떠나보려 합니다. 크게 비도덕적이지도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니지만 나를 괴롭히는 중독에 마음이 어려웠던 분이 있다면 함께 이 여정을 떠나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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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방에는 어떤 물건이 들어 있나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겠지만, 비버의 왓츠 인 마이백(What's in My bag!)을 해보려고 해요. 최근 당근에서 구매한 LMC 가방 안에는 나이가 지긋해서 충분히 기다려줘야하는 14년형 맥북에어, 대중교통에서 읽을 책 한 권과 볼펜 그리고 인덱스, 핸드 크림과 립밤, 양치 도구, 여분의 렌즈와 인공눈물, 캐나다에서 산 가죽지갑 그리고 현대인의 필수품 ‘타이레놀’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잦은 두통으로 타이레놀을 들고 다니는 편입니다. 안 먹는 게 제일 좋은 건 알지만, 두통은 정말 참고 싶지 않습니다.
꽤나 오랫동안 두통을 가까이하면서 두통이 오는 몇 가지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두통이 올 때면 자연스레 제 일상을 돌아보고 점검하곤 합니다. 가장 먼저는 눈이 무리하고 있진 않은지 확인합니다. 제 두통의 8할은 안구건조인 경우입니다. 장시간 렌즈를 끼고 있진 않은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것은 아닌지 확인합니다. 그렇다 싶으면 얼른 렌즈를 빼고 인공눈물을 충분히 넣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물을 천천히 많이 마십니다. 두통을 유발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카페인입니다. 카페인을 과다섭취해서가 아니라 과다복용하던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을 때 두통이 오고야 맙니다. 이름하야, ‘커피 두통’이죠.
"아니 무슨, 커피를 안 마셔서 두통이 와?"
라고 의문을 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편두통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뇌혈관 확장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커피는 뇌혈관을 정상 수준보다 더 수축시킵니다. 일상처럼 커피를 서너잔씩 마시다 보면 몸은 어느덧 좁아진 혈관이 정상인줄 착각하는 거죠. 그래서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은 날이면 뇌혈관이 확장되면서 두통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심한 경우에는 혈관의 박동에 따라 머리가 아픈 박동성 두통을 느끼기도 하게 되죠. 맞습니다. 저는 카페인 중독자입니다. 커피 애호가이기도 하고요. 하루에도 커피를 적게는 3잔, 많게는 5~6잔을 마십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카페인 중독 안 된 사람이 어딨나요?"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커피를 안 마시면 금단현상으로 두통이 찾아와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이니… 적절한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사실, 저 뿐만 아니라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커피 뿐만 아니라 술, 담배, 게임, SNS, 쇼핑 그리고 수많은 커뮤니티 등 다양한 카페인으로 치열한 일상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착취하고 소진하여야만 하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경쟁의 대상이 되는 이런 피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독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값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쉬는 시간에 누리는 자그마한 쾌락의 요소로, 지친 삶의 동기부여로, 좋은 자극과 영향을 얻기 위해서 손댔던 것들이 이제는 하루의 큰 부분이 된 것이죠. 없으면 일상에 지장이 있을 만큼 말입니다. 쉽고도 가벼운 보상으로 보상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자극, 더 큰 자극을 바라게 되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다만 저는 이 문제를 개개인의 약한 의지나 타락한 윤리, 도덕, 일탈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무튼 제 이야기로 돌아와서, 머리가 지끈 지끈해질 때면 저는 커피를 하루에 한 잔으로 제한합니다. 정말 애석합니다. 커피와 커피 문화가 함유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사랑하는 저에게 커피를 끊어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속상할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커피를 더욱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랑하기 위한 방법임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더 오래도록 사랑하기 위해서 절제해야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혹여 저처럼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써티즈가 있다면 부디 두통이 아닌 향긋한 커피향으로 즐길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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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중독이 없던 시대가 과연 있을까요? '중독'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방대한 역사서 서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겐 그런 역사서를 기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간략히 '오늘 우리 사회가 중독된 것들'을 읊고 소개하는 정도로 기록해둘까 합니다. 지면과 재능의 한계로 깊은 글을 쓰지 못함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술'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술은 명백한 화학물질임에도 다른 화학물질과 다르게 취급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독성 있는 다른 약품들은 법적으로 강력히 규제되고 처벌되지만, 똑같이 중독성을 가진 술은 단지 관습적으로 자제될 뿐입니다. 하지만 술이 망친 관계들의 수(특히 가정 내의 관계)를 고려해 보면, 적어도 술에 부여하는 규제가 좀 더 날카로울 필요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음주 운전에 관해선 그 규제가 강력해지고 있는 것은 사회에 유익하다고 봅니다. 한블리(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의 역할이 큰 게 아닌가 싶고요.
근래 '종교' 중독 문제도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JMS가 대표적인데요. JMS는 원래 통일교의 강사였던 정명석 씨가 1978년에 설립한 단체입니다. JMS 내에선 정명석 씨를 하나님의 사람 내지 재림 예수로 추앙하는 등 종교 중독 현상을 보입니다. 신도들이 처음부터 정 씨를 숭배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들의 포교 방식이 문화적으로 접근하여 서서히 삶에 스며든다는 점에서,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으로의 가속성을 보입니다. 다행히 JMS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김도형 교수 등과 넷플릭스와 MBC가 큰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어떤 이는 우리 사회가 '혐오' 중독에 빠져있다고도 말합니다. 혐오는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는데요. 무슨 말이냐면, 어떤 이익 집단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대체로 약자들)을 혐오 집단으로 규정하여 적대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동성애자 혐오나 이슬람 종교 혐오와 같은 것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방식을 고집하는 이익집단은 우리 근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제와 조금 멀어지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혐오에 관해 조금 더 쓰자면, 혐오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예로부터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해 자주 활용되는 전략입니다. 나치도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혐오 집단으로 규정하여 적대하였고, 그로 인해 인류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홀로코스트라는 흑역사를 남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의견을 덧붙여 두자면, 위와 같은 역사를 가진 인류이기에, 권력 집단이 약자들(가령, 보호가 미흡한 사각지대의 장애인이나 노동자)을 불법자로 규정하여 혐오하는 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참여에 의해 감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 부정적인 중독에 관해서만 기록해두는 것 같아, 훗날 역사가 될지도 모를 이 글(설마)을 읽는 후세에게 조금 민망할 것 같아서, 긍정적인 중독에 관해서도 하나 언급해두어야겠습니다. '활자 중독'은 그나마 제가 찾은 중독 중에선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영상'이 강세인 시대를 살고 있지만, 방대한 기록은 역시 텍스트의 형태로 남겨질 게 아직은 분명해 보입니다. 짧게 자극을 위해 소비되는 쇼츠에 남은 잔상보다는, 조용하고 지루하게 두꺼운 책에 차곡차곡 담긴 사상이 더 고밀도일 테니까요.
끝으로, 이젠 고전이 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무언가에 중독된 여러 인간 군상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권력(어린 왕자가 방문한 첫 번째 별의 늙은 왕)에, 어떤 이는 허영심(두 번째 별)에, 어떤 이는 술(세 번째 별)에, 어떤 이는 소유하는 것(네 번째 별)에, 어떤 이는 일(다섯 번째 별)에,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보(여섯 번째 별의 지리학자)에 중독되어 삶을 삽니다. 써티즈들은 어떤 것에 삶을 기억으로 바꾸고 계시나요? 이참에 <어린 왕자>를 읽으며, 사유와 성찰로 삶을 반추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어린 왕자>라는 '활자'를 제안 드립니다. 어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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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부모 부양 의무 없어…15년 사이 달라진 대답’ 눈에 띄는 뉴스 헤드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애먼 사람들끼리 싸우기 딱 좋은 프레임이었죠. “아, 댓글창 또 불붙었겠네.” 구시렁거리며 뉴스를 클릭했습니다. 2022년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이 '부모 부양의 책임은 자식에게 있다'는 의견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1%만이 자녀의 부모 부양 책임에 동의했다, 반면 반대 의견은 49%를 넘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현 사회의 어떤 부양 문제점으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해법은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스크롤을 내려 뉴스 댓글도 천천히 읽어봤습니다. 댓글에는 자녀의 부모 부양 책임 문제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세대 갈등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아야지 자식을 노후수단의 도구로 보는 자체가 정신나간 발상이지’, ‘자식들도 대학부터 독립하라! 결혼비용도 바라지 말고! 각자 스스로 책임져’ 똑똑한 유튜브 알고리즘은 다음 뉴스도 추천해 줬습니다. ‘노시니어존까지…격해지는 세대 갈등?’ 특정 어르신이 공공장소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는데 이것을 전체 노인 집단으로 과도하게 일반화해서 출입제한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두 뉴스는 세대 차이에 집중되어 시대의 차이를 바라보기 더 어려워졌고 세대 혐오와 차별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해법은 멀어진 채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쏘아졌죠.
틀딱, 한남, 메갈, 좌빨, 보수꼴통. 이 외에도 특정집단에 ‘극혐’과 ‘ㅇㅇ충’이라는 말을 덧붙여 혐오에 익숙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극도의 혐오 표현을 왜 쉽게 쓰는 걸까요? 김경일 심리학자는 감정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감정은 쾌감부터 혐오까지 각 대상과 크기가 모두 정확해야 하는데요. 혐오는 감정의 대상과 크기에 대한 부정확도로 인해 생기는 것이죠. 청년과 노인,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등 감정 대상의 부정확도가 생기는 이유는 다양한 경험 부족으로 인한 단면적 판단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싫어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만한 사회생활을 강요받으면서 감정 표출을 억압받았기 때문에 감정 크기의 부정확도가 생기고 혐오 조절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책 <혐오사회>에서는 타인을 혐오하는 감정은 사실 누군가가 정교하게 설계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설계한 혐오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죠. 근거 없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빠르게 확산되는 미디어의 변화. 그리고 노인, 난민, 외국인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책임 전가와 희생양을 만드는 포퓰리즘 정치처럼요.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대한 특정 언론사의 헤드라인도 그랬습니다. ‘전장연 지하철 시위 2년… 피해액 2700억, 1회 평균 1시간 4분 지연’, ‘서울교통공사, 장애인 단체 지하철 시위 중단 요청… 시민 불편 커’ 물론 공공장소에서의 시위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위로 인한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고 언론사와 국가기관은 시위의 원인과 문제 해결방법보다 시민들 간의 갈등과 피해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의 혐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언론과 국가에서 설계한 혐오 감정은 안전과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키워 사회구조적 문제를 사회적 약자끼리의 갈등으로 바꿔 표현했죠. 저는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또 구시렁거립니다. ‘그래 시위할 수 있지. 그래 피해가 생길 수 있지.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그래서 국가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 그래서 바뀐 게 뭔데?’ 저는 제 안전과 이익을 저보다 약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을 생각이 1도 없는데 왜 자꾸 제 이웃을 혐오하게 만드는지요. 제 안전과 이익은 제 삶을 대변하고 결정하는 국가 결정권자 혹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 이로부터 가져오는 것인데 말이죠. 혐오중독사회에서는 화살을 던져야 할 곳을 올바르게 찾아야만 혐오에 맞서 진짜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듯 합니다.
김경일 심리학자는 혐오 감정을 건강하게 다루는 법을 말해주었습니다. 혐오라는 감정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그 이후의 행동은 선택의 문제라고요. 혐오의 감정을 곰곰이 생각한 뒤 다양한 접속사를 붙여서 행동을 ‘결정’하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이 싫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 돼’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죠. 본질적인 문제 해결 없이 혐오만 남은 사회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요. 써티즈는 누구를 혐오하나요? 그리고 그다음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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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티공방이란?
써티즈의 다양한 대화와 삶을 뚝딱뚝딱 만들어 가는 공론장! 공론장이란 사회적 주제나 이슈를 놓고 다양한 사회구성원이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나 혼자만의 고민을 갖고 있나요? 써티랩은 개인의 고민이 사회의 고민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삶과 이야기를 공론화합니다. 대화를 통해 더 나답고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찾고 싶은 써티즈, 함께해요!
📢두 번째 써티공방의 재료 <질병>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를 맞이하게 된 요즘, 질병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나의 투병이 되었든, 내 가족의 간병이 되었든 질병없이 달리 말해, 의료 서비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돌봄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의료 서비스 뿐만 아니라 가족 혹은 지인의 때로는 전문 간병인을 통한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돌봄(Care)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우리 삶 곳곳에 자리한 돌봄의 문제를 하나의 사례를 통해 톺아보고자 합니다. 부모님의 간병을 어떻게 준비할지 선택하는 질문들로 이뤄진 아래의 테스트를 통해 나의 간병 유형을 파악해보고 '돌봄'에 대해 이야기 나눠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써티즈, 함께 해요!
- 나와 가족들의 질병을 치료하면서 겪은 제도적, 심리적 어려움을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써티즈
- 훗날 부모님의 간병 방식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고 싶은 써티즈
- 써티랩 연구원들의 뉴스레터 제작 과정을 체험하고 싶은 써티즈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 일시: 2023년 7월 8일 오후 2시~4시
- 장소: 공간희희(을지로3가역 인근)
- 참여비: 5,000원(다과 제공)
- 모집인원: 4명(정원 모집 시 마감)
- 함께 할 활동
- 아래의 간병 유형테스트를 통해 나의 돌봄유형을 알아보고 ①'나는 간병(돌봄)에 준비된 사람일까?' ②'돌봄과 관련된 현행제도에 사각지대가 있지는 않을까?' #투병과 간병 #돌봄노동과 돌봄비용 #제도와 인식에 대한 생각을 써티공방에서 함께 나눠요. - 참여 후 공방에서 나눈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글로 쓴 뒤 써티랩에게 전달해 주세요. 여러분의 후기를 써티랩 뉴스레터 8월호에 담아 보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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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티공방에서 함께 나누고픈 질문이 있다면 신청서와 함께 보내주세요.
❗ 기타 자세한 안내사항은 신청해 주신 써티즈에게 개별 메시지를 통해 알려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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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뉴스레터는
써티랩이 제조한 다음 뉴스레터 주제는 '질병'입니다. 7월 25일 화요일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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